평안이 당신 곁에 있기를.
저는 지금 덴마크에서 보냈던 시간을 뒤로 하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떠나온 곳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곱씹으며 편지를 씁니다.
✨ 눈부신 한달 간의 쉼
한달살기를 마무리하며, 자유스콜레의 한달살기 프로그램을 설명한다면 어떤 문장을 지을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곳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한 문장에 녹이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제게 가장 소중하고 눈부셨던 조각을 꺼내 여러분께 전해봅니다.
이 글 속에서 당신이 모든 당신을 기꺼이 환대하는 공간을 마주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보세이만의 교육
보세이에 올 적 기대했던 것은 대안적 공동체와 대안적 교육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한 대안이란, 한국의 기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이었어요. 한국에서의 교육과 달리 보세이에서는 각자의 몸 상태에 맞는
움직임을 소개해주는 체육 수업들, 느리다면 느린대로 제 속도를 찾을 수 있게끔 하는 분위기, 열심히가 아니라 안전히, 잘이 아니라
즐겁게 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종종 게임, 악기, 운동 따위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늘상 저는 "좋아하지만 잘하지는 않아"라며 사족을 붙였지요. 그 말을
듣는 모든 아이들이 "너는 잘할 필요가 없는 걸, 좋아하는 마음이 가장 중요한 거지."라고 답을 하던 것이 떠오릅니다. 특별히 사려깊
어서, 다정해서, 친절한 아이라서 그리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게 이곳에서 당연한 사실이라 바로 튀어 나오는 답이었지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저 또한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너는 이곳에 왜 왔어? 무엇이 너를 이곳으로 데려 왔니? 하고요. 일본어를 배우려고,
한국의 아이돌을 좋아해서, 경찰이 되고 싶어서와 같이 명확한 목적이 있는 아이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 수많은 꿈 사이에서 제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대학 진학 전 잠깐 쉼이 필요했다"는 말이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그저 쉼이라 말하는 아이. 그 친구의 말에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았습니다. 너는 그냥 쉬려고 왔구나, 좋다.
하고 말았지요. 대학에 들어가기도 전 반 년을 외부에서 고립된 학교에서 보낸다는 건 한국에서는 많은 이유를 필요로 하는 선택이
지만 이곳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의 지도에 쉼표를 찍는 게 이다지도 당연하고 스스럼 없는 일이라는 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장학생에 지원하는 에세이에서, 이곳을 “쉼과 멈춤을 타박없이 품어내는” 곳이라 상상한다는 글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쓸 때
조차 저는 무언가를 타박없이 품어낸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건 합당한 이유와 근거와 맥락 위에서만 멈춤이
용인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어느 때에건 그 자체로 가치 있음을 모두가 안다는 뜻이었습니다. 선택의 가치는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어요. 그걸 겪은 뒤에야 알았습니다.
☑️ 충만함을 품은 새로운 시작
많은 기대를 품고 이곳에 왔습니다. 한국 대안 교육의 원형을 마주하는 것, 외국인들과 소통하는 일에 익숙해지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찾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것. 하지만 여즉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선명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기대가 충만
히 채워졌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제가 이곳에서 얻은 것이 최초의 기대를 가뿐히 넘어섰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 속에는 다정이 있고, 모르는 것 속에는 설렘이 있다지요. 다정이 늘어나는 시간 속에서도 여즉 설렘을 품을 수 있는 한 달을
보냈다는 것이 참 소중했습니다. 이곳에서 내딛었던 걸음들을 오래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앎과 이해가 사랑과 관계의 전부가 아님
을 이곳에서 배웠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모든 것이 다르고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는 불가해의 순간 속에서도 애정을 품을 수 있던
시간을 기억합니다.
밤마다 일기를 적었습니다. 그만큼 기억하고 싶은 날들이었습니다. 그 속에 적힌 모든 이름들과, 그 하루들을 만들어준 모든 분들께
고맙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길게만 느껴졌던 한 달도 지나고 나니 순식간입니다. 그럼에도 이 편지가 닿은 당신 옆에, 제가 쥐었던 것
들 또한 가닿기를 바랍니다.
지나온 걸음들을 사랑하며, 깊게 남은 흔적을 오래 보듬고 살피겠습니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 이 마음들을 갚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보세이를 뒤로 하며,
윤 드림.